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산함 사건 (문단 편집) === 왕징웨이의 외유 === 한편 왕징웨이는 3월 22일 중앙정치위원회 회의 이후 중앙상무위원회에 병가를 내고 잠적해버렸다. 3월 23일에 그의 측근 천궁보가 직접 그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잠적에 장제스도 당황하여 중앙정치위원회 결의에서 왕징웨이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몇차례 화해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뤄지지 않았고 왕징웨이는 4월 1일 프랑스로 떠나기로 결정, 장제스에게 자신의 관인을 내주어버렸다. 왕징웨이는 중앙감찰위원 장런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장제스|그]]가 아주 싫어졌다. 이제 두번 다시 정치책임은 지고 싶지 않다! 4월 9일, 장제스는 편지를 보내 왕징웨이에게 황포군관학교 경비 삭감, 키산카가 횡포를 부리는데도 키산카의 편만 든 것, 왕징웨이가 우유부단하고 자주성이 없다는 것 등 10가지 불만을 지적했다. >...[[장제스|아우]]가 산터우에서 돌아와 즉시 북벌을 제안했을 때, [[왕징웨이|형]]은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북벌을 위한 비용까지 준비하며 결심을 보였다. 그러나 키산카 고문이 반대하자 갑자기 그 태도를 바꾸었다. 이는 형에게 자주성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키산카는 북방에 배로써 군대를 수송하면 된다고 제의했다. 이것은 정말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천박한 전술이며, 이 제의의 이면에는 북벌을 시키지 않겠다는 독침이 있다. 그래서 북벌을 실행할 성의가 없음은 명백하다. 그의 생각은 [[쑨원|총리]]의 일생의 소원이었던 북벌의 뜻에 상반된다. > >2전대회 이래 당무, 정치, 군사가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서 조종되고 있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군사조차도 자주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잃었다. 혁명의 전도는 절망적이다. 중국혁명을 제3자에게 조종당하게 해서는 안된다. > >총리의 연소용공 정책의 뜻과, 소련이 중국혁명과 독립을 돕는다고 하는 약속에 위반되어서는 안된다. 이 점을 확실히 교섭하도록 제의한다. 이것은 키산카만의 책임이 아니라, 형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키산카는 또 북방으로 거점을 옮겨 훈련할 것을 권하는데,[* 이는 친소군벌로 평가되던 [[펑위샹]]의 영지로 이동하자는 주장이었다.] 그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다. 즉, 아우가 하루라도 광동에 있으면 키산카의 계획은 그만큼 실천이 어려워진다. 그는 나를 광동으로 떼어놓아 군의 중심을 잃게 하고, 우리 당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왕징웨이는 5월 11일 홍콩을 거쳐 프랑스로 떠나버렸다. 장제스는 [[쑹쯔원]]을 시켜 왕징웨이에게 돌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왕징웨이는 듣지 않았다.[* 조너선 펜비는 이를 연기라고 신랄하게 평가한다.] 훗날 왕징웨이는 자신이 막강한 정치적 실권을 가진 상태에서 어째서 그렇게 잠적해버렸냐는 질문에 장제스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배경한 교수는 왕징웨이의 외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국민정부 주석과 군사위원회 주석, 국민혁명군 총당대표로서 국민정부 내에서 실질적인 정치 주도권을 행사해 온 왕징웨이가 왜 스스로 잠적하고 외유길에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다른 해석이 엇갈린다. 왕징웨이의 성격이 정치적 투쟁을 끈질기게 벌이지 못할 만큼 담백하다거나, 고난에 부닥치면 후퇴하거나 회패히버리는 낭만적 혁명가 기질이 있었다며 성격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해석도 있다. 한편, 왕징웨이가 원래 개인적 야심이 없는 데다 자신의 문관 우위적 입장으로 인해 장제스와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다는 시각도 있으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왕징웨이와 장제스 사이에 이념적 경향 차이가 존재하여 결국 분립을 가져왔다는 견해도 있다. (...) 왕징웨이의 성격이 독특하다거나, 그와 장제스의 이념이 달랐다는 사실이 그의 외유와 잠적에 대한 부분적 이유는 될 수 있으나 충분한 설명은 될 수 없다. > >(...) > >결국 왕징웨이가 택한 잠적은 (군사 실력자들의 불복종과 소련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야기된) 현실적인 무력감과 실추된 권위의 결과일 텐데, 그 표현 방법이 잠적과 도피였다는 것은 그의 이른바 낭만적 혁명이나 성격과 관련있을지도 모른다.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84, 92 페이지. 이후 [[후한민]]도 왕징웨이의 실각을 틈타 귀국했으나 왕징웨이는 후한민을 압박하여 홍콩으로 외유하도록 강요했고 5월 11일, 후한민은 왕징웨이와 같은 배를 타고(...) 홍콩으로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